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게시판
  2. 자유게시판2

자유게시판2

자유게시판입니다.

게시판 상세
제목 <오랜만입니다>“6·25전쟁서 살아남은 미안함… 80세 넘어서도 詩 쓰는 원동력”
작성자 이**** (ip:)
  • 작성일 2021-02-14 10:33:16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33
평점 0점


문덕수 시인이 새 시집 ‘아라의 목걸이’를 최근 출간했다. 그는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내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는 문학계의 원로다. 올해 만 84세인 그를 만나서 물었다. “이 연세에도 시를 쓰고 새롭게 시집을 펴낼 것이라고 젊은 시절에 예상했나요?” 그는 “허허, 글쎄요”라며 숨을 고른 후에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 말에 갑상선암이 퍼져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후에 김남조(85) 시인을 만났는데 ‘생애 마칠 때까지 시집 두 권만 냅시다’라고 하더군요.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어느 새 시집 두 권을 냈어요. 결과적으로 스스로 한 말을 어긴 셈이 됐어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문 시인의 목소리는 듣기에 얼핏 거칠었다. 악성종양으로 한 쪽 성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을 또박또박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병과 싸우고 있는 노시인에게 많은 말을 시키는 게 저어됐지만, 그는 꼿꼿한 자세로 3시간여 동안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문단 실세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도 욕을 먹지 않고 언제나 점잖고 너그럽다는 평을 들었던 그의 인품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지난 2일 그를 만난 곳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문학사’ 사무실. 그는 여기서 부인인 김규화 시인과 함께 잡지 ‘시문학’을 펴내고, 각종 문학 관련 책을 출간하고 있다. 문 시인은 1971년 현대문학사에서 창간한 ‘시문학’을 1973년에 인수해 40여년 동안 매달 운전자보험비교사이트출간하고 있다. ‘현대시학’ 다음으로 오래된 이 잡지는 한국 문예지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문학’이 권위를 인정받고 있긴 하지만, 시 독자가 줄어든 시대에 수지 타산이 맞습니까.“처음부터 적자였던 잡지를 인수했어요. 지난 40년간 수지를 맞춰본 적이 없어요. 계속 적자예요. 그것을 메우는 것은 발행인의 힘이에요.”발행인은 김규화 시인을 말한다. 문 시인은 편집인이다. ―적자를 메우는 비결이 뭡니까. (건너 편 책상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내보험찾아줌있던 김 시인이 대신 답했다.) “전에는 정부 지원도 있었고, 기업들이 광고를 주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문 선생이 집필한 ‘문장 강의’‘오늘의 시작법’ 등 대학 교재가 스테디셀러로 큰 힘이 됐어요. 시인들도 구독료 명의로 십시일반 도와줬고요. 이젠 그것도 희미해졌어요. 개인 돈을 보태 겨우 겨우 꾸려가지요.”―돈 안되는 내보험다보여잡지를 그만 두고 싶을 때는 없었습니까.“많이 있었죠.”(김규화) “지금도 고민 중이에요.”(문덕수) ―이번에 나온 새 시집 ‘아라의 목걸이’에는 운율을 맞춘 시조가 30여편이 들어 있더군요. 시조는 처음으로 발표한 것이죠.“그렇습니다. 시조도 시라는 시각으로 써 본 것입니다. 보통은 정형시의 시조를 통해 언어를 압축하는 훈련을 한 후에 자유시로 오는 경로를 밟지요. 저는 역행한 셈입니다.”옆에 있던 부인이 “시조시인협회장을 지낸 한분순 시인이 문 선생의 시조가 좋다고 하더라”고 전하자, 문 시인은 “예의상 그러는 것일 뿐, 본격적인 비평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노년에도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는 실험 정신과 함께 자신의 작품에도 엄격한 평론가의 시선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고향에 관한 시 ‘마산에 가고파’ 등이 눈길을 끌더군요. 고향에 관한 시를 전에도 썼습니까.“예전에는 안 썼어요. 마산에서 문학 강의를 할 때 제 고향인 함안 출신의 한 여성 시인이 고향에 관한 시가 있느냐고 물어서 곤란했어요. 그 뒤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제목에 나오는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로, 제 고향 근처에 있었지요. 분명히 존재했던 나라인데 문헌 자료가 없는 탓에 우리 역사에서 쏙 빠졌어요. 그것을 최근에 알게 돼서 ….”―시인들은 대체로 고향에 관한 시를 많이 쓰지 않습니까.“정서의 근원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바깥을 돌아다니다보니 과거를 되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이 중요했으니까요. 나이가 많아지니 고향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자연스럽게 ….”―서문에 시는 ‘가치의 기록’이라고 했더군요. “시는 자연발생적인 암보험비갱신형감정, 생각을 담는 것이라고들 여깁니다. 그러나 시는 의식적으로 써야 합니다. 도덕, 종교, 정치적인 것의 가치를 시 형식에 담아내야 하니까요. 도덕이 문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운 때에는 가치 면을 더 중시하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6·25 때 국군으로 참전한 경험 때문에 시문학에 심취하게 됐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후에 바깥 세계보다는 내면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지요.”그는 6·25 체험을 꼭 전하고 싶었던지 직접 타자로 친 긴 글을 보여줬다. 이에 따르면 그는 중등학교 교원채용 시험에 합격해 통영고(당시 6년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전쟁이 발발해 마산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불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입대했다. 1951년 육군종합학교를 마치고 2사단에서 복무하던 중 철의삼각지대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군병원에서 후송돼 치료를 받다가 제대했다. 그는 “전쟁 때 온 산야를 뒤덮었던 신음과 절규가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고 했다. “그때 전사한 동료 장병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직도 가슴에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문 시인은 이번 시집에 담긴 시조 ‘이 아픔’에 그 심정을 담았다.―청마 유치환의 추천으로 등단했는데, 청마를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됐나요.“제가 고교 교사로 있던 통영에 청마의 집이 있었습니다. 정지용 시인이 여행을 하다가 청마를 만나러 왔을 때, 정 시인과 함께 청마를 뵈었지요. 정 시인은 키가 작았는데, 매우 소탈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시는 사물을 묘사해서 리얼리티를 찾는 형식주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유치환 시는 진리나 진실을 역사 속에서 찾는 역사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역사주의’ 청마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문 시인의 시 세계가 정지용의 ‘형식주의’ 영향을 더 받은 것은 한국문학사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다.―1963년 ‘시단’ 동인지에는 문 시인의 ‘선에 관한 소묘’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가 함께 발표됩니다. 정 반대 경향의 시 작품인데요.“맞습니다. 전혀 반대죠.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들이 동인을 이뤘기 때문에 그렇게 됐죠. 신동엽 시인은 호리호리했는데 의지력이 아트테크강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시단’ 동인 중에 황금찬 시인이 현역 시인 중에 최고령이신데, 자주 만납니까.“거의 못 만나요. 가정적으로 여러가지 불행한 일을 겪었는데, 늘 웃으며 인생을 즐겁게 사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놀랍습니다.”―1970년대에 문협 이사장 선거 때 한 쪽 편을 들어줬다던데.“아마 김동리, 조연현씨 대결이었을 거예요. 그때 제가 조연현씨 편을 들었을 거예요.” (당시 문단 선거는 정치판 못지 않게 치열했으나, 같은 문학을 한다는 동지적 유대감은 강했다고 한다.)―문 시인은 미당 서정주 시인과도 친했는데, 작품 세계로 보면 거리가 있지 울산출장마사지않나요.“그렇게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미당이 다른 시인과 달리 두 개의 시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저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 현실의 세계에 천착하는 베타(β)의 눈, 그것을 초월하는 알파(α)의 눈을 퀵서비스미당은 다 갖고 있었어요. 보통 시인들은 하나의 눈만 갖고 보지요. 삼국유사를 다룬 퀵서비스요금미당의 시에 대해 신라 쪽을 편들었다고 하지만, 미당은 거기서 불교의 초월적 세계를 본 것이지요.”결국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시 세계와 미당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 문 시인은 자신이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으로 있던 1990년대 초반에 겪은 문단 비화를 소개했다.“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후보자를 비밀리에 추천해달라고 했습니다. 미당을 추천했지요. 이 즈음에 노벨문학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유럽의 한 신문사 논설위원이 재미한국인 교수 이모씨와 함께 방한했어요. 그런데 그 논설위원이 미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가 전두환 정권을 찬양했다는 대목에서 바로 ‘노(No)’ 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낙망을 했던지 ….” ―1980년대 펜클럽 가개통폰부회장 때 회장은 모윤숙 시인이었지요.“여걸이었습니다. 친일 문제가 있긴 하지만, 문인들을 위해 참 여러가지 일을 했지요. 1982년 시드니 국제펜클럽대회에서 김지하 석방을 위해 영어로 열변을 토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윤숙 씨는 “한국을 인권이 없는 나라로 몰지는 말라”고 하면서도 “한국에 가서 김지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태도를 취했지요.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청와대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1970,80년대에 문인, 예술인단체들은‘어용’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문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한 소설가 이름을 고양이분양거론하며) 그 시절이 아닌었던가 생각해요.”―1980년대에 문단이 순수, 참여문학 두 파로 나뉠 때 문단의 리더로서 마음이 아팠겠습니다.“김동리 같은 분은 그랬겠지만 저는 그 때만 해도 아직 어렸어요.” 그는 199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 집행위원장을 했던 경험을 말할 때 어린아이처럼 신난 표정을 지었다.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인데, 세계 각국에서 200여명의 시인이 와서 대대적으로 화려하게 치러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시인들이 개성적인 시낭송 무대를 펼쳤지요. 그것이 우리나라 시낭송에 퍼포먼스를 도입하는 역사적 계기가 됐지요.”그는 국제 앤솔러지(시선집) ‘시간 너머의 은유(Metaphor Beyond Time)’를 발행한 것을 대회의 큰 성과로 회고했다. 한국문학사상 유럽 작품을 포함한 국제 앤솔러지는 최초였다.―시는 현실을 바꾸는 힘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를 쓰는 시인으로 살아온 삶이 만족스럽습니까.“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라고 하는 존재가 결함이 많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는가 싶어서 두렵습니다.

첨부파일
비밀번호 수정 및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관리자게시 게시안함 스팸신고 스팸해제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

수정 취소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

댓글 입력

댓글달기이름 :비밀번호 : 관리자답변보기

확인

/ byte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회원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화살표TOP
  • 버튼
 

QUICK ICONS

라인

  • 공지사항
  • 문의하기
  • 상품후기
  • 동영상
  • 이벤트
  • 회원가입
  • 등급안내
  • 마이쇼핑
  • 고객센터
  • 상품검색
  • 장바구니
  • 관심상품
  • 적립금
  • 쿠폰관리
  • 내게시물
  • 배송조회

TODAY VIEW

이전 제품다음 제품

barbar